
습관
나는 무슨 일이든 처음 하는 일에는 끝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처음으로 고금을 배우던 날도, 실수를 해 물구나무서기로 가규를 베껴 쓰기를 할 때도 나는 모든 끝을 생각했다. 고금을 이 만큼 연습하면 함광군이 저를 칭찬해주시겠지, 물구나무서리고 가규를 베껴 쓰고 나면 다음에는 잘 하라며 택무군이 저를 다독여주시겠지. 나는 그런 버릇이 있었다. 처음해보는 일의 끝을 생각하는.
“좋아해, 남사추.”
물론 그것은 ‘사랑’ 이라는 추상적인 단어에도 포함되었다.
“몇날며칠을 생각해봤는데 역시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꼭 받아달라는 말은 아니니까 생각만 해줘.”
금 공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저는 ‘금 공자를 좋아한다.’였다. 하지만 저는 금공자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다. 지금은 남 씨 일지 몰라도 결국 저는 온 씨였고, 금 공자는 지금은 모른다고 해도 저의 태생을 알게 된다면, 그 때도 지금처럼 저를 사랑해줄까?
“너무 갑자기라….”
“얼마면, 얼마나 더 기다리면 될까?”
귀 끝이 빨개지고 평소의 금 공자 같지 않은 조급한 모습으로 저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아니 재촉하고 지금 저의 대답이 궁금함에도 저를 위해 대답을 참고 있었다. 금 공자의 배려와 다정함이었다. 제가 반한.
“다음에, 다음에 만나면 대답해드려도 될 까요?”
저의 대답에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떨구곤 말했다.
“그럼, 그럴게. 혹시라도 내 마음이 불쌍해서 받아주는 거라면 비참 할 것 같으니까. 신중하게 고민해줘. 아니, 불쌍해서라도 받아줘도 괜찮아, 대신 나한테 티만 내지마.”
이렇게 사랑스러운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다만 당신이 나에 대해 알게 되어도 저를 사랑해주실 건가요?
“신중히, 신중히 생각할게요. 금 공자의 마음.”
* * *
신중히 생각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싶었다. 저는 이미 금 공자를 좋아하고 있었다. 금 공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함광군을 따라 갔던 금린대에서 저보다 작은 체구의 아이가 금종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함광군께 인사를 하는 게 저와 금 공자의 첫 만남이었다.
‘아원 인사하거라.’
함광군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손을 공손히 모아 금종주님과 그 아래 어린 아이에게 인사를 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종주가 웃으며
‘망기가 키우고 있는 수제자라더니 총명한 아이로구나. 아릉 너도 함광군과 이 아이에게 인사를 하거라.’
친절하고 다정한 목소리의 종주의 말에 그의 옷을 꼭 쥐고 있던 아이가 손을 모아 함광군과 저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곤 다시금 그의 옷 뒤로 숨어 그의 옷자락을 꼭 쥐며 경계를 놓치지 않고 저를 바라봤다. 문득 그 날의 금 공자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경계심을 놓치지 않고 새로운 사람들을 보는 것이 꼭 고양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는 저도 금 공자도 너무 어려 많은 대화를 할 수는 없었고, 그 후에 함광군이 저를 데리고 금린대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아이를 보기란 쉽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으면 다친다고.’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저는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금종주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의 뒤에 숨어 경계하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아이는 어느새.
‘아, 죄송합니다. 금 공자.’
저와 눈높이가 비슷해질 만큼 커져있었으며, 누구보다 늠름해졌다. 옷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서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제가 부담스러웠는지 ‘왜, 뭐?’ 하며 반문하는 금 공자에게 저는 그저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많이 크셨네요. 금 공자.’
제 말에 뭐가 기분이 나쁜지 고개를 갸웃하다가 저에게 얼굴을 들이밀면서 물었다.
‘너 나 알아? 아 하긴 나를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아니면 나를 본 적 있어?’
다만 너는 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제가 어린 시절 보았던 그 때의 너의 모습이었다.
“풋.”
저에게 들이밀던 그 얼굴도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저를 보며 경계하던 그 얼굴 판박이라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사추 뭐가 웃겨서 웃는 거야?”
“아, 위선배 오셨어요?”
“남잠이 바쁘길래, 소중히 여기는 토끼들 밥이라도 대신 줄까 싶어 왔지. 사추도 토끼 밥 주러? 뭐가 그렇게 웃겨서 웃어? 토끼들 밥 주는 게 그렇게 재밌어?”
“아니요, 그냥 웃긴 게 생각이 나서요.”
“우리 아원이가 웃긴 게 뭘까, 이 선형아도 궁금한데.”
위선배에게 그 날의 일들을 말하면 금 공자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얼굴이 새빨개져 한 동안은 저에게 삐져 저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할 것이었다.
“비밀이에요.”
“좀 섭섭한 걸. 우리 아원이가 비밀도 생기고.”
괜히 토끼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저가 어릴 때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제 옆의 이 남자를 누구보다 따랐고 좋아했었겠지.
“그래서 무슨 고민인데.”
“고민이요?”
“지금 얼굴에 쓰여 있잖아. 나 고민 있어요. 라고.”
그리고 언제나 저는 이 남자에게 저를 숨기지 못했다. 거짓말을 하면 저를 땅에 묻고 ‘아원, 거짓말 하면 어쩐다고 그랬지?’ 하며 저의 볼을 약하게 꼬집던 남자. 제가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 된 건 고소 남 씨의 가규도 있었지만 이 사람의 덕이 제일 컸겠지.
“위선배라면 어떨 것 같아요?”
“뭐가?”
“함광군과 위선배가 원수지간이라면, 아니 그러니까 어른들끼리 사이가 안 좋아서 일이 있었는데 위선배는 그래도 함광군을 너무 사랑한다면, 함광군 역시도 위선배를 사랑한다면 위선배는 함광군을 받아주실 건가요?”
“남잠이랑 내가 그런 사이라면? 그럴 리는 없을 텐데, 흠.”
“예를 드는 그런….”
“내가 남잠을 많이 사랑하는 거지? 남잠을 잊으려고 애를 썼는데도 결국 남잠이 아니면 안 되는 거지? 내가 아니라 내 어른 세대의 문제인거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렇다면 그냥 남잠을 사랑할래.”
“하지만 나중에 함광군이 위선배의 정체를 알 고 위선배를 경멸하면,”
“그건 그 때가서 생각해봐야지. 시작도 안 해보고 끝을 생각하는 건 안 좋은 버릇이야. 아직 시작하지 않은 건 시작해보지 않은 이상 모르는 거야. 처음 시작하는 거라 무서워서 그러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처음이니까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 더 재미있을 것 같다. 라고 생각하는 거지.”
웃으면서 저에게 조언을 해주는 이 사람은,
“안 해보고 포기하는 것보다 해보는 게 더 좋잖아. 경험이 될 테니까.”
“선형아!”
“그래, 그래 우리 아원.”
함광군이 아니었다면 제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근데 남잠이 오기 전에 떨어지는 게 좋을 거야, 아무리 아원이라고 해도 함광군은 화나면 무서우니까.”
“그것도 그렇네요.”
* * *
“사추 나 주변에 객잔이 있나 알아보고 올게. 아씨랑 여기서 기다려.”
“응, 경의 조심해서 다녀와.”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이 찾아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보고 있자 그림자가 제 위로 드리워졌다.
“금 공자?”
“단풍, 묻었어. 칠칠 맞게.”
“아 감사해요.”
제 머리 위로 붙은 단풍잎을 떼어 제 손에 얹어줬다. 그의 손이 닿았던 머리를 살살 털어내곤 조금은 두꺼워진 옷에 고개를 묻었다. 추워서 열이 오른 건지 당신이 닿았던 손의 열기가 전달 된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전에 내가 했던 말.”
“네?”
“대답, 다시 만나면 해준다고 그랬잖아.”
언제 또 키가 이렇게 컸는지 눈이 닿았던 거리가 조금 멀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손을 뻗자 얼굴을 조금 붉히며 뒷걸음질 했다.
“금 공자는 단풍이 정말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저의 머리에 붙은 단품을 떼어 저에게 주었던 단풍을 그의 귀에 꽂아주자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터질 것 같았고 곧 귀마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한 번 웃자 ‘웃기긴 뭐가 웃겨!’ 하면서 틱틱거리곤 저에게 등을 보인다. 그럼에도 귀에 꽂힌 단풍은 떼지 않았다. 괜히 내가 무안할까봐 혹시라도 제가 그 모습에 상처 받을까봐 저를 신경써주는 당신의 다정함이 좋았다.
“금 공자, 저를 좋아한다고 하셨지요?”
“…어.”
“그건 금 공자가 제가 남사추이기 때문에 저를 좋아해주는 건가요? 아니면 제가 저라는 한 사람을 좋아해주는 건가요?”
“뭐?”
“제가 남사추가 아니어도 저를 좋아해주실 건가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지금은 말 할 수 없어요. 하지만 꼭 물어 보고 싶은 질문이에요. 금 공자 당신이 사랑하는 건 남사추인 저 인가요, 아니면 저 라는 한 사람을 좋아하는 건가요?”
기가 차다는 듯 저를 보고 한숨을 내쉬다 이내 제 어깨를 붙잡으며 결심이라도 한 듯 말했다.
“한 번만 말 할 테니, 잘 들어.”
고개를 조금 끄덕이자 입을 열며 저를 바라봤다.
“네가 남사추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나는 너라는 사람이 좋은 거야. 네가 너이기 때문에, 그래서 네가 좋아. 그래서 너와 더욱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은 거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너도 처음이고 나도 처음인데 기왕 하는 거면 재미있게 해보자. 처음이니까 앞길을 모르는 것도 재미있잖아. 뭐, 아, 아무튼 그렇다고.”
당신의 말을 듣는 순간 이해했다. 나는 내가 갖고 있던 습관은 결국 처음에 도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란 걸.
“금 공자는 정말 위선배를 닮았어요.”
“그거 욕이야?”
“아니요. 제가 존경하는 분이에요. 위선배는.”
제 말의 뜻을 잘 이해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그에게 숨을 들이 마시곤 다시금 입을 열었다.
“금 공자, 저번에 했던 그 고백에 답을 드릴게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저를 바라보는 당신이, 기대감과 두려움에 찬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당신이.
“금 공자가 좋아요. 사실 금 공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 더 먼저 금 공자를 좋아했어요. 하지만 겁이 나서 말을 못했는데, 금 공자의 말을 듣고 깨달았어요. 우리 둘 다 처음이라면, 재미있게 해보자는 말. 제 처음이 금 공자라서, 금 공자 같은 분이라서 정말 다행이에요.”
생긋 웃으며 말하는 저를 당신은 멍한 얼굴로 보다 이내 슬금슬금 올라가는 입 꼬리는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저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고마워. 사추, 아니 아원.”
사랑하는 사람에게 불리는 제 이름이 이렇게 간지러운지 알았더라면 조금 더 빨리 제 마음을 고백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저도,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아릉.”
당신을 닮은 단풍이 떨어지는 이 계절에 끝을 생각하지 않는 처음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