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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는 건

 

 

올려다본 하늘은 푸르고 청명했다. 남사추는 가을이 돌아온 기념으로 작은 밭에 무를 심었다.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흙을 꼭꼭 덮었다. 두더지가 땅을 파헤치기 때문에 골치가 아프기도 했지만 먹으려고 심는다기보다는 연례행사와 다름없어서 개의치 않았다. 두더지가 출몰해도 남사추는 곤란해하면서 쫓아내는 것에 그쳤다. 그래서 저와 같은 토끼 수인이자 친우인 경의가 가끔 두더지와 말싸움을 했다.

 

“이 두더지가?! 야! 사추가 착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넌 내 손에 죽었어! 알아?!”

 

남사추는 대부분 홀로 있었다. 그래서 경의와 두더지의 사이를 중재하는 일마저도 꽤 즐거웠다. 남사추는 부모님과 함께 살던 이곳을 사랑했다. 조금 멀지만 가까운 곳에 경의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꽃이 만발한 언덕에 숨어 사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꽃은 시들어도 매해 다시 피어나고 그 곁에서 작물 몇 개를 심어 수확한 뒤 경의와 나누어 먹는 것도 남사추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였다. 또한, 자신을 도와주는 경의네 부모님께 약소하지만, 선물로 드리는 것도 보답한다는 느낌이 들어 뿌듯했기에 남사추는 이곳을 떠나 살 거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때가 되면 보는 거지만 늘 새롭구나’

 

지금 같은 계절은 언덕이 새로운 색으로 물드는 시기였다. 그것이 붉고 노랗고 따뜻한 색이라 남사추는 언덕이 새 옷을 지어 입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는 어릴 적 몰래 내려갔던 인간 마을에서 본 것과 같았다. 부모를 졸라 기어코 그 손에 옷을 쥐고는 신나서 뛰어다니는 아이와 같아서 저도 모르게 살포시 웃게 되는 것이다.

 

남사추가 웃으면서 언덕을 보고 있는 그 시각, 인간 마을 어귀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금가의 도련님들이 예의도 모르고 싸움을 벌인 것이다. 그것이 일대일도 아니고 일대 다섯이라나. 소동의 주범은 평소 제 친구들에게 자신이 금릉의 숙적이라 주장하며 위세를 떨었다. 그래놓고 비겁하게 숫자로 덤볐다. 그런 주제에 한 대 맞고는 제 아버지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르는 것이 금릉은 우스웠다.

 

“알량한 놈. 가다가 넘어져서 코나 비뚤어져라!”

 

금릉이 발끝으로 돌을 차며 말했다. 어차피 제 외숙이 더 강하고 본인의 가문이 더 거대하니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마음까지도, 강하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금릉에 대한 항간의 소문은 더 좋지 않아질 것이다. 금가의 도련님은 제 외숙, 가문만 믿고 설친다. 저잣거리에 글 모르는 아이들 노래에도 알음알음 들어있었으니. 또한, 금릉 본인도 자신의 성격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뭐라도 사냥할 생각으로 활을 챙겨 나왔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쳇, 다 어디 간 거야?”

 

이대로 돌아가기는 싫어서 금릉은 더 멀리 걸었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자주 오는 산 뒤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울창한 나무들은 들어서는 곳부터 빽빽해서 금릉은 속으로 감탄을 뱉었다. 선자라도 데리고 올걸. 중얼거리며 금릉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응? 누가 들어왔나요?”

 

붉은 단풍잎을 쥔 남사추가 답했다. 나무들이 웅웅거리자 물웅덩이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어떻게 된 걸까요? 사람이 들어오신 건 정말 오랜만인데”

 

원래 남사추가 있는 언덕의 입구는 안개가 심하게 껴서 음습한 분위기를 내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발견하더라도 사람들은 곧 발을 돌렸다. 가끔 용기 있는 청년들이 저들끼리 내기를 해서 야심 차게 들어와도 입구에 있는 나무들이 길을 움직여 돌려보냈다. 남사추는 그것이 자신을 위한 나무들의 배려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따금 나무들과 얘기를 하러 언덕을 타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인간인 금릉이 남사추가 있는 언덕 언저리까지 온 것이었다. 나무들은 웅웅거리며 왜 길이 움직여지지 않는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했다. 그들의 음성에는 높낮이가 없지만 당황했다는 느낌이 다분했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금방이겠어요. 괜찮아요. 잠시 숨어있으면 금방 돌아갈 거예요”

 

남사추는 나무들을 달래고 언덕 중앙에 있는 큰 은행나무에 올라가 몸을 숨겼다. 안개가 낀 입구가 을씨년스러운 느낌이라면, 그 뒤에, 남사추가 있는 언덕은 햇빛이 비치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숲의 입구의 안개와 나무들은 눈속임이나 다름없었다. 인간들의 탐욕은 끝이 없기에 그들이 이곳에 발을 들이는 것을 원치 않은 숲속 정령의 힘이었다.

 

“여기에 이런 곳이 있었나? 여기랑 저기랑 완전 딴판이네”

 

외숙에게 보여드리면 어떨까. 라고 중얼거리며 남사추가 있는 은행나무 앞까지 도착한 금릉은 털썩 앉아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그런데 햇볕이 너무 따뜻한 탓인지 금릉의 마음마저 물렁물렁해져서 감추고 있던 울컥하는 마음이 차올랐다. 이번에도 제 잘못이 아니었다. 물론 주먹을 날린 건 제 잘못이지만, 그 자식을 때린 걸 금릉은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이 고까웠을지 몰라도 제 앞에서 부모의 이름을 운운한 녀석이 잘못이었다. 그런데 저잣거리를 비롯한 세상은 금릉을 그저 치기 어린 도련님이라고 생각했다. 따가운 시선이 들러붙는 날에는 잠자리도 사나웠다.

 

“아, 짜증 나게…”

 

그만 울어. 눈물이 흐르는 눈가를 손으로 문질러댔지만 계속해서 나오는 바람에 금릉은 적잖이 당황했다. 눈가가 붉어지고 쓰라렸지만, 그냥 놔두기에는 제 꼴이 짜증 나서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금릉을 보며 남사추는 내려가서 달래줘야 할지 고민했다. 눈가가 붉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눈물을 닦는 걸 보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 것 같아서 가만히 있으려고 했다. 하지만 금릉의 볼에 있는 작은 상처를 발견했다. 그리고 금릉이 문지르면서 상처가 벌어지는 것을 본 남사추는 조심스레 나무 밑으로 내려갔다. 그전에 경의가 선물해준 가면을 썼다. 그 가면은 얼굴의 반을 덮고 머리 부분부터 허리까지는 부드러운 털이 엮여있어서 귀와 꼬리를 가릴 수 있었다.

 

“저기 괜찮-”

“히이익! 너, 누구야! 뭐, 뭐야!”

“아,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이 가면은 경의가 ‘이것을 쓰면 인간세계로 놀러 갈 수 있어’라는 뜻으로 남사추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하지만 남사추는 금릉의 반응을 보고 그건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금릉은 제 검을 꽉 쥐고 제 앞에 나타난 낯선 이를 노려보기만 했다. 이미 모습을 감추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한 남사추는 어찌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옆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을 주워 금릉에게 건넸다. 하지만 금릉이 이게 뭔데 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머쓱해진 남사추가 손을 내렸다.

 

“어, 저는 남사추라고 합니다. 도련님께 해를 끼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흐,흥! 놀란 거 아니거든?! 갑자기 나타나서 그런 거야!”

“그럼 다행이에요. 저, 얼굴을 보여주시겠어요? 아까 보니 상처가 짙어지신 것 같아서요”

“네가 무슨 상관인데!”

 

‘저런! 고얀 놈이 다 있나!’

‘이런 놈을 왜 들여보내신 거람?’

‘친절을 베풀 필요 없다. 썩 물러가라 말하거라!’

 

저 멀리 있는 나무들부터 가까이 있는 나무들까지 금릉을 나무라며 웅웅거렸지만, 금릉에게는 들릴 리가 없으니 뜻을 아는 남사추만 조용히 웃었다. 그걸 본 금릉이 놀랐던 저를 보고 비웃는 줄 알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웃어!”

“아, 별거 아니에요. 상처를 좀 봐도 될까요?”

“어,어? 만지지마!”

“죄송해요. 그래도 약을 발라야 흉터 없이 아물 거예요”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투와는 다르게 남사추의 손은 망설임 없이 금릉의 볼에 닿았다. 금릉은 간지러운지 몸을 웅크리며 얼굴을 뒤로 빼려고 했다. 남사추는 그런 금릉의 턱을 움직이지 않게 살짝 잡아 고정했다. 옅은 상처에 약을 둥글게 바르니 그 외에 닿는 것이 제법 부드러웠다. 자기도 모르게 더 닿고 생각하던 남사추가 화들짝 놀라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아아! 좀 살살 발라!”

“아, 죄송해요!”

“씨이…. 치료하는 거 맞아?”

“제법 좋은 약이에요. 이레 정도 바르시면 흉도 안 질 겁니다”

“그 말은 그동안 계속 이곳에 오라는 얘기야?”

 

*이레 : 이렛날의 준말, 곧 한 주.

 

금릉은 툴툴거리며 남사추를 흘깃 봤다. 조심스럽게 상처를 어루만지던 손가락이 멈췄다. 잠시 찾아온 정적에 금릉이 말실수를 했나 곱씹어보던 그때 남사추가 말했다.

 

“아니요. 약은 통에 담아 따로 드릴 테니, 이곳에 오지 마세요”

“왜?”

“오늘은 운이 좋아 오셨지만 아마, 이곳을 다시 찾지는 못하실 거에요 어두워지면 길을 잃으실지도 몰라요. 그러니 어서 돌아가세요”

 

그래, 오늘의 일은 우연이야. 정령님이 왜 이분을 들여보내신 것인지 몰라도 두 번 다시 뵐 수 없을 거야. 그리 생각하며 남사추는 노란색 통에 약을 담아 금릉에게 건넸다. 약을 받아든 금릉은 그 통을 다시 남사추에게 건넸다. 남이 보기에는 던진 거지만 어쨌든 건넸다. 남사추는 자신의 품으로 들어온 약통을 한 번, 고개를 들어 금릉을 봤다. 금릉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여, 여기가 다 네 거야? 그리고 내가 왜 못 찾아!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럼 나랑 내기해. 내 상처가 아물 때까지 매일 찾아오면!”

“..?”

“그러면…, 아! 네 얼굴을 보여주는 거야”

 

머뭇거리던 금릉은 대뜸 내기를 제안했다. 자신이 내건 것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금릉은 뿌듯한 얼굴을 했다. 남사추는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곧 내기를 받아들였다. 어차피 오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금릉이 이곳을 찾지 못해서 혹시나 사람들을 이끌고 오면 나무님들이 돌려보내 주실 거다. 또한,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숲의 정령님이 가만있지는 않으실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금릉은 두고 보라며 언덕을 빠져나갔다. 사추는 금릉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웅웅-

 

“아, 나무님. 아니에요. 오랜만에 사람을 봐서 그래요. 네, 네.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오늘은 꿈을 꿨다고 생각해요”

 

나무들은 금릉과 있었던 그 짧은 시간에 남사추의 기분이 부풀었음을 눈치챘다. 또한, 나무들은 오랫동안 남사추가 자신과 또래인 아이를 내심 바랬던 것을 알았다. 그래서 정령이 허락한다면 저 꼬마에게만 길을 내어줄 요량으로 물었다. 하지만,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들의 속부터 살피는 이 아이를 어쩌면 좋을지. 남사추는 금릉이 있던 나무에 머리를 기대고 노란 은행잎과 저물어가는 해를 번갈아 보았다. 노을이 지면서 비치는 붉은 하늘과 노란 은행나무 잎은 금릉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이내 바람에 날려 보냈다. 바람길을 따라 날리는 잎을 보며 남사추는 눈을 감았다.

 

“봐봐 또 왔지? 너 한 번 진거다?”

 

다음날, 예상과 다르게 금릉은 정말로 남사추를 찾아왔다. 나무들이 따로 길을 내준 것은 아닌지 나무들은 그런 금릉이 어이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을 바르라는 금릉을 바닥에 앉히고 저는 무릎을 꿇고 하얀색의 약을 손가락에 묻혔다. 상체를 일으켜 손을 상처에 가져다 댔다. 금릉은 얼굴을 움찔하기는 했지만, 어제와는 달리 얌전했다. 확실히 어제보다는 더 옅어진 상처에 딱지가 생기고 있었다. 또한, 금릉의 볼은 어제보다 더 말랑거렸다. 남사추는 계속 드는 이상한 느낌에 서둘러 약을 발랐다.

 

“간지러워도 긁지 마세요”

“알았어”

“약은 다 발랐으니 이제 가셔도 돼요”

“나 배고파”

“네?”

“오늘 외숙이 집을 나가서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나 밥해줘”

“이곳은 주막이 아니에요. 집에 가서 드세요”

“나 정말 배고파”

 

금릉은 불쌍한 눈을 하며 사추의 옷자락을 잡고 보챘다. 난감해하던 사추는 금릉의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근처에 있는 풀을 뜯기 시작했다. 나무들은 남사추를 말렸지만 대놓고 홍조를 띄우며 즐거워하는 남사추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더울 때 수확해둔 감자를 으깨어 이전에 인간 마을에서 본 것을 흉내 냈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맛은 나쁘지 않았는지 금릉은 고기가 없냐고 하면서도 잘만 먹었다. 그 모습에 남사추는 웃었고 나무들은 혀를 찼다. 또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남사추! 여기봐봐!”

“헉! 금릉 놀라게 하지 마세요!”

 

그 이후에도 금릉은 계속해서 남사추를 찾아 언덕에 왔다. 나무와 숲의 눈속임은 이상하게도 금릉에게는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남사추는 그것이 못내 감사했다. 아흐레에 한 번 경의가 놀러 오기 전까지 자신은 항상 혼자였다. 또 인간 마을에 내려가지 못하게 된 이후로 더욱 그랬다. 물론 나무님이 있고 꽃이 있고 작물도 심을 수 있었지만 제 또래로 보이는 이와 얘기를 나누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넌 겨우 그런 거로 놀라냐? 바보 같긴…. 와악!!”

“금릉! 조심하셔야죠! 여기는 잘못 헛디디면 발목에 무리가 갑니다”

“아, 알았으니까. 이거 놔!”

“아, 죄송해요. 잠시만 가만히 있으세요”

 

수북이 낙엽이 쌓인 곳은 땅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곳에서 발을 헛디딜 뻔한 금릉의 허리를 잡아챈 것은 단단한 남사추의 팔이었다. 남사추는 금릉을 붙잡은 채 말했다. 그리고 금릉과 자신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금릉의 안위가 더 걱정인지라. 남사추는 제 품에서 바둥거리는 금릉 때문에 놓칠뻔한 허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도 금릉의 허리를 에워싸 단단히 고쳐잡았다. 그것이 마치 금릉이 남사추에게 안겨있는 모습과 같아서 금릉은 계속해서 바둥거렸다.

 

“왜, 왜 이래 미쳤어?”

“가만히 있어요. 허리 다쳐요”

“이….”

 

남사추는 허리를 잡았던 한 손을 들어 금릉의 머리를 받쳤다. 근처 꽃밭에 받친 머리부터 붙든 허리까지 조심스럽게 금릉을 내려놓은 남사추가 팔을 풀었다. 금릉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남사추도 가면 뒤 자신의 얼굴이 홧홧 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후에도 남사추와 금릉은 함께 다녔다. 어느 날은 장난을 치고 어느 날은 같이 밥을 먹고 어느 날은 언덕을 거닐며 구경했다. 그러면서 남사추는 금릉과 있는 시간이 이전보다도 더욱 소중해졌음을 느꼈다. 그래서 금릉과 약속한, 딱 이레가 되는 내일이 오지 않기를 빌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더 빨리, 해가 밝았다.

 

“남사추! 나 왔어!”

“금릉, 기다리고 있었…. ,금릉! 얼굴이 왜 그래요?!”

“아아, 별일 아니야! 나 또 다쳤으니까. 이제 얼마만큼 더 약 바르면 돼?”

 

이렛날, 어찌 된 연유인지 금릉은 얼굴에 다시 상처를 달고 나타났다. 금릉과 더 있고 싶었지만, 금릉이 다쳐서까지 그렇게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 말간 얼굴에 전보다는 작지만, 또 다른 상처가 뚜렷하게 자리했다. 그런데 자신의 얼굴을 걱정하지도 않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약을 발라 달라고 하는 금릉에 남사추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요?! 대체 누구예요!”

“깜짝이야. 왜 화를 내고 그래!”

“어서 말해요. 금릉. 대체 누가…!”

 

형태도 없는 누군가를 이렇게나 미워할 수 있는지를 남사추는 처음 깨달았다. 시선이 바닥에 떨어지고 분노와 자책감에 남사추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아, 이게 아닌데….”

 

금릉이 낮게 내뱉었다. 그리고 남사추의 주먹 쥔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잡아왔다. 살짝 떨리고 있는 주먹을 조심스레 펴서 그 손바닥에 자신의 얼굴에 대고 비비적거렸다.

 

“나 아파, 남사추. 그러니까 나 안 아프게 약 발라줘”

“...”

“응?”

 

찌푸려진 미간이 펴지고 아래를 향하던 시선이 금릉의 눈에 고정되었다. 잔잔한 바람이 불어서 금릉의 잔머리가 남사추의 손을 간지럽혔다. 인간이라는 건 이렇게도 위험할 수 있는 것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은 금릉에 대한 모든 것이 조심해지는데 금릉은 그와 반대로 대담해졌다. 그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건 남사추였다. 그런데 행동은 대담하면서 반대로 금릉의 얼굴만은 계속 붉어지니 자신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더했다. 자신을 올곧게 쳐다보는 저 눈빛에 남사추는 목 뒤까지 홧홧해짐을 느꼈다.

 

“그래서 며칠? 며칠 더 와야 해?”

“..나흘이면 괜찮아질 거예요”

“더 잘 댈 걸 그랬나…”

“네?”

“아니야. 약이나 잘 발라”

 

남사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잠시 생각해보려는 찰나 금릉이 자신의 얼굴을 확 돌려 남사추를 봤다. 놀란 남사추가 손가락을 황급히 떼는데 음흉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금릉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남사추. 우리 약속 잊지 않았지?”

“아…, 네, 잊지 않았어요. 그런데….”

“응?”

“아, 아니에요”

“뭐야, 싱겁긴”

 

저렇게 기대하는 눈빛을 보고 어찌 거절의 말을 할 수 있을까. 또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안된다고 부모님도 나무님도 항상 말씀하셨다.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 내가 인간이 아니어도 그는 받아주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남사추는 두 손으로 가면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하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요량으로 남사추는 입을 열었다.

 

“금릉은 제 얼굴이 그렇게도 궁금하신가요?”

“응, 그러니까. 안된다고 하지 마. 거짓말쟁이 남사추라고 떠벌리고 다닐 거야”

“제가 얼굴이 일그러져있거나, 눈이 한쪽 없거나…. 인간이 아니면, 그러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난 상관없어. 네가 어떻든”

“...”

“계속 그렇게 밍기적거리면 내가 벗긴다?”

 

정말 대신 벗기려는지 제 가면에 두 손을 뻗어 겹쳐오는 금릉에 뒷걸음질 친 남사추가 알았다며 소리를 빽 질렀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가면을 천천히 벗어 내려놓고는 가만히 금릉의 반응을 기다렸다. 긴장감에 남사추의 귀가 빠르게 움직였다. 금릉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옆만 보는데 정작 상대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침묵이 너무 무서웠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아무 말도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 금릉에 남사추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야”

“..네”

 

금릉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뭔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목소리에 남사추는 고개를 더 숙였다. 왜 이렇게 죄인이 된 것만 같을까. 남사추는 당장에라도 달아나고 싶었다. 그런데 금릉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남사추의 사고를 정지시켰다.

 

“나 귀 좀 만져봐도 돼?”

“제 귀, 귀를요?”

“응, 한 번만 만져볼게”

“아, 그게 좀 예민한 부분이라서…. 안돼요”

“예민한 부분?”

“아, 아무튼 금릉, 보시다시피 저는 인간이 아니에요. 그래도 괜찮아요?”

 

금릉이 자신의 귀에 대해 궁금하다는 티를 내자. 남사추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빤히 보이는 의도에 금릉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게 뭐, 네 입장에서는 내가 신기한 존재인 거 아니야?”

“...네”

“그리고 원래 이 세상 것들은 다 다르게 생겼어. 저 나무들만 봐도 다 다른데 당연한 거 아니야?”

 

그 당연한 말이 남사추 본인에게는 너무 낯선 말이라.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나무들은 금릉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가지를 흔들대며 말했다. 그런 남사추를 보던 금릉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라고 말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뒤를 돌아앉는데 갑자기 느껴지는 손길에 몸이 튕기면서 남사추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흔들대던 가지가 우뚝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금릉이 남사추의 꼬리를 쥔 형태대로 말린 제 손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남사추를 보고 말했다.

 

“한 번만 더 만지면 안 돼?”

“안돼요!”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남사추가 빼액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나흘도 지나고 금릉의 상처는 거의 아물어 딱지가 생겼다. 금릉은 제 무릎에 남사추의 머리를 두게 하고 그의 말랑한 귀를 조물딱 거리며 만졌다. 남사추는 체념한 듯 몸만 움찔거리며 제 귀를 내주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거부했지만, 꼬리도 만졌는데 귀라고 안될 거 뭐 있냐며 금릉 특유의 반짝거리는 눈으로 계속해서 보채는 탓에 어쩔 수 없었다고 저를 타일렀다. 하지만, 그 덕에 피가 말리는 것은 또 남사추였다.

 

“금릉 거기는 너무 꾹 누르지 마세요”

“왜?”

“간지럽고…. 느낌이 이상해요”

“그래? 알았어”

 

그럴수록 보란 듯이 더 꾹꾹 눌러대는 손이 얄미웠다. 남사추가 금릉의 손장난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움직임이 멈췄다. 금릉의 목소리가 위에서 듣기 좋게 울렸다.

 

“남사추, 우리 집에 가보지 않을래?”

“금릉의 집에요?”

“응, 여기보다 맛있는 것도 많고 네가 좋아하는 무도 많아”

“다시 말하지만 저는 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는 안 숨겨도 돼”

“아니에요”

 

남사추가 단호하게 말했다. 입매가 일자가 된 남사추의 얼굴을 본 금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듯 입을 뻐금거렸다. 남사추는 그런 금릉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 그리고 네가 머물 수 있는 곳도 있어”

 

잠시 머뭇거리던 금릉이 입을 열었다. 말을 잇는 금릉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네가 좋아하는 꽃도 많이 심어줄게. 여기 오고 싶으면 언제든 나랑 오자”

“금릉”

“나 이제 아버지의 뒤를 이으려면 이곳에 매일 올 수 없어. 네가 원하는 거 다 해줄게. 그러니까 나랑 같이-”

“금릉, 저는 금릉과 함께 갈 수 없어요”

“..왜? 나랑 있는 게 싫어?”

“그게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나랑 있는 게 싫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금릉?”

 

“금릉, 왜 울어요….”

 

제 볼에 닿는 것이 소나기가 아니라 금릉의 눈물이라는 것을 인지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허리를 숙여서 눈물을 닦아주려는데 금릉이 제 손으로 남사추의 손을 탁-하고 때렸다. 그러면서 몸이 약간 기운 남사추가 균형을 잡기 위해 바닥에 손을 짚는데 빠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살펴보니 가면의 이음새 부분이 약간 부서져 있었다.

 

“남사추 바보!”

 

곧이어 잔뜩 울먹이는 얼굴로 두 손에 힘을 줘 남사추를 밀어뜨린 금릉이 제 손에 넘어진 사추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다가 재빠르게 언덕 아래로 뛰어갔다. 그런데 하필 넘어뜨린 곳도 푹신한 꽃밭이라 남사추는 금릉을 따라갈 수 없었다. 멍하니 하늘을 보던 남사추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이내 손바닥 밑이 축축해졌다. 나무가 웅웅-거리며 사추를 달랬으나 멈추지 않았다.

 

사흘 뒤, 간만에 남사추를 찾아온 경의는 곤란한 듯 머리를 짚었다.

 

“사추! 그건 정말 위험해! 금릉이라면 인간들 사이에서도 성격 못되기로 소문난 아씨라고!”

“경의, 나는 그분을 다시 뵙고 싶어. 적어도 내 언행에 대한 사과는 드리고 싶어”

“이, 이, 바보 같은 남사추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그 철부지 없는 아씨가 멋대로 오해하고 심술부리고 간 건데!”

 

어릴 때 빼고는 단 한 번도 인간 마을에 내려가지 않던 남사추가 성격 더럽다는 아씨를 만나려고 이렇게 고집을 부리다니! 경의는 얼굴도 모르는 그 아씨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고 싶은 심경에 휩싸였다. 인간 마을에 가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금릉의 가문은 그 유명한 난릉 금가라서 가면을 쓰고 신분도 불명확한 남사추를 들여보낼 리가 만무했다. 그 자리에서 병사들이 그냥 쫓아내면 다행이고 최악의 경우 가면이 벗겨져 정체가 들통날 수도 있었다. 벌어질 상황들을 이것저것 생각하던 남경의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안된다고 말하려 고개를 들었다.

 

“엉? 남사추! 어디 갔어!”

 

하지만 남사추는 이미 없어진 뒤였다.

 

“어디로 가야 하지?”

 

한 손으로는 부서진 가면의 이음새 부분을 잡고 다른 한쪽 팔로는 꽃전을 담은 소쿠리를 옆구리에 낀 채, 남사추는 금릉을 찾아 무작정 걸었다. 가면이 워낙 특이한 탓에, 마을 사람들이 남사추를 쳐다봤지만 정작 남사추는 그런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참을 걸으니 다리가 아팠다. 환했던 하늘은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남사추는 꽃전을 돌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자신은 바닥에 풀썩 앉았다. 솔솔 부는 바람이 가면 뒤 얼굴에 있는 땀을 식혔다. 조용한 언덕에만 있다가 시끌벅적한 저잣거리를 돌아다니고 가면의 이음새 부분을 신경 쓰고 금릉을 찾아 헤매느라 지쳐있던 남사추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휙- 탁-

 

그때, 갑자기 세차게 분 바람에 의해 이음새 부분이 완전히 부서져 남사추의 얼굴이 드러났다. 다행히 머리부터 허리까지 장식된 털 부분이 귀와 꼬리를 아슬아슬하게 가렸다. 청순하게 생긴 이가 꽃전을 옆에 두고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으니 팔러 온 것인가 싶어 근처를 지나던 아낙네들이 곁으로 다가왔다. 한둘이 더 오니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잠을 자는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남사추의 눈 뜬 모습과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하지만 곤히 자는 이를 깨우기가 영 그런지라 모두가 눈치만 보던 그때, 용기 있는 한 소녀가 남사추의 어깨를 쿡 찔렀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이거 파는 것이오?”

“으음, 네..?”

 

졸린 눈을 비비며 꿈뻑거리는 남사추를 본 이들의 마음속에는 내적 환호성이 터졌다.

 

어쩜, 눈 뜬 모습은 또 이리 청순하고 곱단 말인가! 거기에 목소리는 곧고 청아하기 그지없다니!

 

“내게 꽃전을 팔게. 내가 다 사겠네”

“내가 먼저 왔소!”

“사고자 하는 이들이 많으니 차례를 지켜 하나씩 받는 게 어떻겠소?”

 

저들끼리 이러쿵저러쿵하는 소리에 남사추는 정신을 차렸다. 어쩐지 얼굴이 시원하고 눈가가 탁 트였다 싶었는데 이게 웬걸 가면의 앞부분은 어디 가고 자신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아닌가. 가슴이 철렁해진 남사추가 제 머리를 더듬으며 가면의 뒷부분이 무사한 것을 알아챘다. 속으로 안심하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사방이 꽉 막혀서는 치맛자락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려면 가면을 붙잡고 뛰어야 하니 꽃전은 버리는 게 될 것이다. 하지만 꽃전은 다시 만들면 될 일. 길을 모르는 곳에서 날도 어두워지면 좋지 않을 것이다. 남사추는 심호흡을 하고 일어섰다. 하지만 그럼과 동시에 부서진 가면 앞부분에 발이 미끄러져 몸이 뒤로 기울었다.

 

‘넘어지는구나’

 

눈을 질끈 감고 가면을 붙잡은 채 다가올 아픔에 대비하는데 이상하게 아프지 않았다. 조심스레 눈을 뜬 남사추는 제가 헛것을 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온종일 찾아 헤맨 금릉이 거짓말처럼 제 앞에, 그것도 자신의 허리를 잡고서 있을 리가 없으니까.

 

“야,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금릉이 여기를 어떻게….”

“비켜! 왜 길을 다 막고 서 있어!”

 

별안간 금릉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길을 비켰다. 금릉이 남사추를 잡고 이끌자 남사추는 돌 위에 있던 소쿠리를 서둘러 집었다. 그렇게 서로 인사할 새도 없이 금릉의 집에 도착했다. 난릉 금가의 집은 무척이나 컸고 금릉과 마주치는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방인 듯 문을 벌컥 연 금릉이 남사추를 들이고 문을 닫았다.

 

“나랑 있기 싫다더니. 인간 마을 못 내려온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금릉 저는 그런 적이-”

 

꼬르륵-

 

금릉을 찾느라 걸어 다닌 탓에 남사추는 한 끼도 먹지 못했다. 그러니 배 속에서 소리가 나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금릉의 배도 같은 소리가 났다. 밥을 안 먹었나? 걱정도 잠시 금릉과 남사추의 얼굴이 동시에 발개졌다. 금릉은 헛웃음을 짓더니 밥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곧 엄청난 크기의 상이 들어왔다. 상과 더불어 갑자기 들어오는 사람들에 놀란 남사추가 숨을 곳을 찾아 침상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남사추를 본 금릉이 사람을 물리고 이불 속에 얼굴을 숨긴 남사추를 꺼내 손에 꼭 쥔 가면을 뒤로 홱 던져버렸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바닥에 자국이 조금 남아있었다. 자국을 유심히 보던 금릉이 자국을 매만졌다.

 

“밥부터 먹어”

 

남사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밥만 먹었다. 본래도 그랬지만 고개를 조금 밥그릇 쪽으로 숙인 채 먹는 걸 보니 배가 꽤 고팠던 모양이었다. 금릉도 배가 고팠지만, 눈앞에 있는 남사추를 보느라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어느 정도 배가 차니, 남사추는 고개를 들었고 금릉과 눈이 마주쳤다. 또 얼굴이 붉어졌다. 시작은 말을 꺼낼 적절한 순간을 고르던 금릉보다 남사추가 빨랐다.

 

“보고 싶었어요. 금릉”

“크흐흠! 잘도 그런 말을…. 나랑 있기 싫다고 한 게 누군데….”

 

금릉이 입술을 샐쭉 내밀었다.

 

“그건! 그때도 말했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금릉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그럼 뭔데!”

“그건-”

 

남사추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인간인 금릉에게는 꺼내기가 그래서 머뭇거렸더니 금릉이 없어졌다. 용기가 없어서 금릉과 오해가 생기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인간 마을에 갈 수 없었던 이유, 과거의 얘기가 남사추의 입에서 술술 나왔다. 부모님이 인간 마을을 좋아하셔서 인간화가 가능해졌을 때 자신도 몇 번 내려갔었다는 것. 인간 마을은 아늑하고 때로는 시끌벅적하고 활기가 감돌아서 꽤 좋아했다는 것. 그러던 중 어느 날 부모님이 인간에 의해 크게 다치셨다는 것. 다행히 회복은 하셨지만, 그때의 무서움이 아직도 자신을 짓누르고 있다는 것까지 모두 꺼내 보였다.

 

“그런데 금릉이 없어지니까, 견딜 수가 없었어요. 다시 한번 보고 싶고 만나서 오해를 풀고 싶었어요. 그래서 내려왔어요. 그런데 금릉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아다니느라….”

“그럼 내가 언덕에 왔을 때 쫓아내지 그랬어. 바보같이 왜 치료해줬어! 나도 인간인데, 나도, 나도…. 너희 부모님을 다치게 한 것들이랑 똑같은…”

 

금릉이 울먹이는 소리를 내자 남사추는 안절부절못했다. 눈물이 고인 금릉의 눈가를 본 남사추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자신이 가져온 소쿠리에서 꽃전을 꺼내 금릉의 입에 물렸다.

 

“어때요?”

“으브으 므므! (이게 뭐야!)”

“금릉이 저 용서 안 해주실까 봐 만들었어요”

“...바브가트아(바보같아)”

“금릉, 금릉이 해준 말 기억해요?”

 

입에 물려진 꽃전 때문에 금릉의 입술이 번들거렸다. 남사추는 금릉이 물고 있는 꽃전을 손가락으로 집어 금릉의 입속에 밀어 넣었다. 빠져나오는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그 또한 부드러웠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다르게 생겼다고 그리 말씀하셨어요. 저는 살아있는 것은 생김새뿐만 아니라 마음도 다르다고 생각해요. 금릉은 금릉일 뿐이에요. 그렇죠?”

 

눈에 물기를 머금은 금릉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잠자코 꽃전을 다 먹자 남사추는 웃으면서 수건으로 금릉의 입을 조심스럽게 닦았다. 금릉이 그런 남사추의 손을 잡아 제 손가락 사이사이로 얽었다. 덕분에 금릉의 입을 닦던 손수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조금 더 단단하게 얽고는 아프지 않게 조심스레 남사추를 제 쪽으로 당겼다. 그 힘에 남사추의 가슴팍이 제 앞까지 가까이 오자 남사추의 어깨에 금릉이 고개를 얹었다.

 

“남사추”

“금, 금릉 너무 가까워요!”

“나는 네가 좋아”

“나, 나도 좋아해요. 금릉, 그런데 조금만 물러서 주시면-”

“널 내 곁에 두고 싶었어”

 

그 순간 남사추의 몸이 뻣뻣해졌다. 금릉은 개의치 않고 남사추의 다리 위로 올라가 앉고는 남사추의 허리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남사추의 몸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내 눈이 닿는 곳에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생각하지 못했어”

“네 얘기를 들어보지도 않고 몰아붙여서 미안해. 나 혼자 멋대로 이해하고, 멋대로 오해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금릉은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남사추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남사추의 귀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답이 없자 금릉은 남사추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비비적거렸다.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한테 사과하는 건데 안 받아줄 거야?”

“..아니요. 금릉이 무엇을 하든, 저는…, 좋아요”

“..바보 남사추”

“정말 좋아해요. 금릉”

“치, 거짓말”

 

그러면서도 금릉은 남사추의 허리를 두른 팔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꽉 끌어안았는데 이에 화답하듯 남사추 또한 금릉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렇게 서로를 꼭 껴안은 채 밤이 지나갔다.

 

“남사추! 남사추! 이거 봐봐!”

“무슨 일이에요?”

 

아침부터 활기찬 금릉의 목소리에 웃으면서 뒤를 돈 남사추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하얗고 말랑거리는 귀가 금릉의 머리에 붙어있었다. 마치 자신과 같은, 토끼의 것과 매우 비슷해 보였다.

 

“어때? 이러니까 너랑 비슷하지 않아?”

“금릉, 그건 대체…?”

“아, 그런데 귀는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해. 그래도 봐봐! 내가 특별히 부탁한 거라고!”

 

금릉은 제 두 손으로 머리에 붙은 귀와 같은 것을 잡았다. 금릉의 손길에 맞춰 흔들리니 진짜로 토끼 귀와 같아 보였다.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남사추가 이상해서 다가간 금릉이 꼬리가 없어서 아쉽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음에는 꼬리도 달고 오겠다고 말했다.

 

“대신 너와 있을 때 만이야! 다른 사람들한테는 못 보여줘. 그러니까 너도 어디 가서 내가 이러는 거 말하면 안 돼! 남사추, 대답 안 해? 설마…. 안 어울려? 그래서 아무 말도 안하는-”

 

쪽-

 

순간 뭔가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금릉의 볼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금릉은 목까지 새빨개진 채로 남사추의 입술이 머물렀던 부분을 손으로 감쌌다.

 

“남사추, 너, 지금…”

“항상 생각했지만, 금릉의 볼은 정말 부드러워요. 다른 곳도 그래서 너무 귀여워요”

“아악! 그런 말 하지마!”

“어떡하면 좋아요? 저, 금릉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힘들어요. 계속 붙어있고 싶어요”

 

남사추는 술에 취한 것처럼 잘도 부끄러운 말들을 늘어놓았다. 상대를 향한 위협적인 걸음과는 달리 말간 웃음을 지으며 금릉한테 다가갔다. 그만큼 금릉은 뒷걸음질 쳤다. 금릉의 등이 벽에 닿았다. 나 없는 사이에 진짜 술이라도 마신 거야?!

 

“흐이익! 남사추 저리가!”

“금릉-”

 

그날 이후, 저잣거리에서는 새로 나온 장신구가 인기를 끌었다. 토끼를 중심으로 귀나 꼬리처럼 동물들의 여러 특징을 바탕으로 출시된 장신구는 아이들의 시선을 이끌었다. 또한, 관심 없는 것처럼 구는 이들도 한두 개씩 사다가 제 정인에게 씌워보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제일 시끌벅적한 저잣거리에는 이 장신구를 파는 것은 물론, 착용하고 있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덕을 제일 많이 보는 것은 장신구의 출처인 난릉 금가가 아니었다.

 

남사추는 금릉과 오해를 푼 뒤 숲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별안간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금릉의 말에 난릉금가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

 

“아, 아릉”

“가만히 있어. 네 꼬리를 확 깨물어 버리기 전에”

“이미 귀 물고 계시는….”

 

그런데 그 도움이 이런 거라니. 금릉은 자신의 잇자국이 옅게 남은 남사추의 귀를 살짝 문질렀다. 그에 맞춰 남사추의 몸이 더 크게 움찔했다. 금릉의 입가가 깊어졌다.

 

“왜? 살살 만져줬으면 좋겠어?”

“아니 그게 아니라, 윽!”

“그런 거 아니면 가만히 있어. 어차피 오늘은 아무 데도 못 가니까”

“그, 그럼 저는 언제 돌아가도 되나요?”

“음.. 장신구 다 만들때까지”

“언제쯤 다 만,만들어...윽!”

“쉿. 너 때문에 우리 집안 사람들이 피해를 보면 되겠어?”

“아, 그건 안돼요…. 그런데 금릉, 너무 간지러워요”

“어쩔 수 없어. 네 귀랑 똑같게 만들려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남사추는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듯 금릉은 장신구를 구실로 남사추를 제 방에 묵게 했다. 얼마 후 찾아온 강징이 노발대발하여 옆 방을 따로 내주었지만, 항상 붙어있으니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동물 장신구의 탄생부터 저잣거리에 퍼진 유행까지, 이 모든 게 난릉 금가의 소문난 못된 아씨의 계획임을 아무도 몰랐다. 또한, 이 모든 게 제 흑심을 위한 장치로 사용되는 것도 금릉만 아는 비밀이었다. 이후 남사추의 소개로 금릉을 만난 남경의가 금릉을 몹쓸 두더지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본편 fin.

 

[금릉 외전]

 

남사추를 밀어 넘어뜨리고 집으로 돌아온 금릉은 방에 틀어박혔다. 금릉이 이틀 동안 식음을 전폐하자 소식을 들은 강징이 서둘러 난릉금가를 찾았다. 금릉의 방으로 가면서 강징은 금릉을 담당하는 시종을 알아보고 붙잡아 물었다.

 

“금릉은 왜 안 나오느냐?”

“그, 그게 어제부터 방에서 우시는 소리만 들리고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만 하시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강징은 미간을 찌푸리며 금릉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금릉! 왜 우는 것이냐! 누가 또 네게 뭐라 한 것이야!”

“아니거든요! 외숙은 좀 나가세요! 저 좀 혼자 내버려 두세요!”

“네 다리가 분질러져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저번에는 일부러 그놈들에게 네 얼굴을 내어주고 상처를 얻어오더니!”

“아 몰라요! 나가요!”

“너무 오냐오냐 키웠더니 성질만 더러워졌구나! 오늘 저녁을 먹지 않으면 정말로 네 다리를 분질러버릴 것이다!”

 

다음 날, 강징의 독촉에 못 이겨 금릉은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는 숲에 다시 찾아가 볼까 하는 마음에 채비하고 나섰다. 하지만 저가 싫다는 남사추에게 어떻게 다시 갈까. 자존심은 둘째치고 저를 밀어내는 남사추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었다. 어떡하나 고민하던 금릉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근원지를 찾았다. 그리고 거기서 그 괴상한 가면을 쓴 남사추를 발견했다.

 

“남사추?”

 

남사추는 옆구리에 뭔가를 들고 저잣거리를 활보했다. 언제는 인간 마을에 내려올 수 없다더니. 다 저를 쳐다보는데 그런 건 전혀 모르는지 남사추는 걷고 또 걸어갔다. 이를 놓칠세라 금릉은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는지 금릉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딜 가는 거야?”

 

그리고 남사추가 바닥에 앉아 잠이 들었을 때, 금릉도 그 자리에서 가만히 지켜봤다. 그런데 한 사람과 부딪쳐 잠시 시야가 달라진 틈에 어찌 된 일인지 남사추가 있던 곳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놀라서 다가간 금릉의 눈에 가면이 벗겨진 남사추의 얼굴이 사람들 틈 사이로 보였다. 곧바로 남사추의 머리를 살펴본 금릉은 귀 부분이 드러나지 않았음에 안심하고 인파를 헤쳐 남사추에게 갔다. 더 가까이 가서 본 남사추는 당황하고 있었다. 제 머리를 더듬으며 식은땀을 흘리는 것이 가면이 부서진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도망칠 요량인지 황급히 일어서는 남사추의 몸이 가면에 걸려 뒤로 기울었다. 그 모습이 금릉에게는 너무 느리게 보였다. 금릉의 팔이 반사적으로 남사추를 붙들었다. 자세도 장소도 엉망이었지만 어쨌든 이리 다시 만났으니 조금 더 좋은 말을 하고 싶었다. 남사추가 자신을 못 떠날 만큼 멋있는 말을, 멍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남사추에게 금릉이 입을 열었다.

 

“야,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제길, 제 입이 이런 것은 다 외숙 때문이었다. 금릉은 집에 가자마자 외숙에게 따질 것이라 다짐했다. 일단 남사추를 잡아둔 다음에, 그다음에 따질 것이다.

 

외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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